미국이 대통령 선거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미국 선거는 독특한 제도로 유명하다. 미국의 독특한 선거 제도를 얘기하면서 빼 놓지 않고 나오는 것이 2000년 대선이다. 당시 민주당 엘 고어 후보가 조지 부시 당선자보다 높은 득표를 하고도 패배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통령선거 제도의 특징, 특히 선거인단 제도와 승자독식 구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물론 엘 고어는 많은 표를 얻은 패배에 승복했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박정희 장군은 5.16 군사 정변을 통해 집권했다. 그리고 1963년12월17일 ‘선거’를 통해 제 5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주요 재벌 기업들은 총수 일가가 2~3%에 불과한 지분율로 거대 기업집단을 거느리는 것은 이미 익히 알려진 일이다.

많은 득표를 하고도 승복하고,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후 선거를 통해 집권하고, 한국 법제도에서 허용한 순환출자를 통해 소수의 지분으로 거대 그룹을 장악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것들은 상식적이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또 일부는 정통성 확보를 위해 이용하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상식과 정의가 지탱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는 절차적 정당성의 기둥 위에 서 있다. 절차적 정당성은 정의롭지 않은 것에도 동의해야 하는 힘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법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죽어간 것이다.

최근 2주간 한국철강산업은 구조조정 얘기로 뜨겁다. 우리는 수 차례에 걸쳐 철강산업 구조조정 논의가 선제적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 점에서 최근 정부와 협회를 중심으로 구조조정 논의가 본격화 된 것에 대해 환영한다. 철강산업 경쟁력 향상을 위해 진행되는 구조조정은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 들여야 하고,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기업과 철강인에게는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 진행되는 구조조정 논의에 뭔가 허전함이 드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현재 진행중인 철강 구조조정이 앞에서 말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

철강산업 구조조정의 불씨가 점화된 것은 한국철강협회가 구조조정컨설팅을 BCG(보스톤컨설팅그룹)에 의뢰 하면서 부터이다. BCG는 약 9억원에 구조조정 과제를 수주했다. 한국철강협회는 재원 조달을 위해 매출액 상위 5개사를 중심으로 ‘민간협의회’를 구성했다. BCG의 구조조정 관련 보고도 민간협의회와 철강협회에 한 것이다. 자금 조성과정을 보면 당연한 결과다.

- 제갈량의 신수도 ´절차적 정당성´이 없다면 무용지물

우리는 한국철강협회와 상위 5개사 중심의 구조조정 논의에 절차적 정당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5개사는 분명히 우리나라 철강산업을 대표하는 기업이다. 그렇다고 5개사가 철강구조조정을 좌우해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정부와 협회는 구조조정 논의로 철강기업들이 불안해하고 자사 이기주의적인 태도로 구조조정의 때와 방향을 놓칠 것을 우려했는지도 모른다. 또 그렇게 될 가능성도 적잖게 있다. 그래서 구조조정 논의를 밀실로 끌고 갔는지 모르겠다.

구조조정은 원래 시끄러운 것이다. 각 사는 물론 거기에 소속된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모두 자기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불이익이 없는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 구조조정이다. 그렇다고 시끄러운 문제를 조용히 없었던 듯 처리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절차적 정당성도 없고, 그 방안이 묘안이라고 해도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오히려 더 큰 반발을 불러와 ‘제갈량의 묘수’라도 표류하게 될 것이다.

구조조정 논의에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철강인들이 동의하는 절차이다. 그리고 한국철강산업의 미래를 스스로 그려 갈 수 있는 장이다. 5개사 중심의 그늘진 회의실이 아니라 한국철강산업의 미래를 함께 고민할 ‘광장’에서의 논의가 필요하다. 이런점에서 한국 철강산업의 구조조정 논의는 양지로 나올 때가 됐다. 좀 시끄럽고, 각종 얘기가 난무해 표류하더라도 밀실 논의 보다 나은 결과를 만들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시끄럽고 거추장스러운 과정이 우리 사회를 버티게 한 힘이자 성장의 동력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BCG컨설팅의 내용의 일단이 알려진 지금도 한국철강협회는 최근 관련기업들에게 ‘비밀유지’를 강조한 것으로 들었다. 철강협회는 아직 양지로 나올 준비가 안 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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