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경영연구원 유승록 자문위원
▲ 포스코경영연구원 유승록 자문위원
조선산업이나 자동차산업과 같은 전통제조업은 철강재가 핵심 자재이다. 새로운 배를 한 척 만드는데 드는 비용의 약 20% 내외가 철강재 구입에 쓰인다. 승용차 1대를 만드는 데에 보통 약 1톤의 철강재가 사용된다고 한다.

선반, 드릴 등 공작기계, 포크레인 등의 건설용 기계들도 핵심 소재는 철강재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철강산업은 조선산업, 자동차산업, 기계산업 등 전통제조업의 가격경쟁력과 품질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산업이라 할 수 있다.

1970~80년대 추진한 정부의 중화학공업육성정책은 한국 철강산업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3만 달러 달성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거북선이 그려진 5백원짜리 지폐를 가지고 영국의 금융가를 설득시켰던 정주영 회장의 영웅담도 국내에서 조선용 철강재의 공급이 충분치 못했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고, 현재의 세계 1위 조선산업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동차산업 또한 마찬가지이다. 1980년대 중반 현대자동차의 엑셀이 미국에서 선풍적인 돌풍을 몰고 올 수 있었던 것도 국내에서 자동차강판을 값싸게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때 한국보다 훨씬 부유했던 동남아 국가들이 아직까지 개도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한국과 같은 경쟁력 있는 철강산업을 육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독일이 자동차, 기계 등의 전통제조업을 바탕으로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수 있는 것도 그 이면에는 이들 산업의 핵심 소재인 철강재를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원활하게 공급하는 철강회사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국제경쟁력이 이미 사라진 철강산업을 왜 그렇게 기를 쓰고 보호하려 하는가? 철강산업이 자국 제조업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기반산업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철강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와 기술개발을 통해 조선, 자동차, 기계 등의 전통제조업을 육성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2차 대전의 잿더미 속에서 다시 부활할 수 있었다. 잃어버린 20년 동안 일본 제조업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최근 다시 반등할 수 있는 힘은 바로 핵심 소재인 철강산업이 그나마 버티고 있었던 덕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세계 여러 국가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3만 달러시대를 넘어 4만 달러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전통제조업이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강건한 철강산업이 존재해야 한다. 만약 철강산업이 경쟁력을 잃어버리면 이를 소재로 사용하는 전통제조업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고 동시에 4만 달러가 아니라 3만 달러의 유지마저도 불가능해 질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 철강산업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가? 사실 지금까지 한국 철강산업과 자동차, 조선, 기계 등의 철강수요산업은 상호 호혜적 관계를 가지면서 동반성장하여 왔다. 철강산업에서는 열연강판, 후판, 냉연강판 등 핵심 철강소재를 수출가격보다 낮게 그리고 국제적인 품질 수준으로 국내 자동차, 조선, 기계 산업에 제공하여 이들 산업들이 국제경쟁력을 단기간에 확보하는데 지대한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철강수요산업들은 높은 경쟁력을 바탕으로 수출 확대, 설비 확장을 지속 추진하였고 이는 새로운 철강수요를 창출하였다. 철강회사들은 이러한 새로운 철강수요를 배경으로 거의 40년 동안 설비확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철강산업과 여타 제조업 간에 성장의 선순환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과연 현재에도 이러한 성장의 선순환이 작동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자칫 성장의 악순환으로 빠져들 수 있는 위기에 처해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국내 조선산업은 심각한 구조조정 과정에 있고 자동차산업은 수년간 생산이 감소하고 있다. 이와 같이 철강수요를 뒷받침 하는 전통제조업이 위기에 처해 있어 지난 40년 동안 확장일로에 있었던 철강생산설비는 과잉이 우려되는 상황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 최대 철강생산국인 중국이 바로 곁에 있다. 중국은 2000년 이후 대규모 설비증설을 추진하였고, 세계철강협회에 따르면 2018년 한 해에만 9억 2천만 톤의 철강재를 생산하였다. 이는 세계 생산량의 51%를 차지하는 것이고, 한국 생산량의 12배가 넘는 양이다.

생산량의 10%만 수출해도 9천 2백만 톤이고 이중 20%만 한국으로 유입되어도 1천 8백만 톤에 달한다. 이는 2018년 한국 철강제품 총 수요량인 5천 4백만 톤의 30%를 초과하는 양이다. 중국산 제품이 한국으로 유입되는 만큼 한국산 철강제품이 한국 시장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철못, 철사, 나사 등의 제품을 생산하던 국내 중소업체들은 모두 사라졌다. 동시에 이와 관련된 철강 소재의 생산도 없어진지 오래이다. 보다 최근 동국제강이 3개이던 후판 공장 중 2개를 폐쇄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동부제철이 경영악화로 매각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것도 중국 제품의 수입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가 더욱 문제이다. 중국산 철강재의 품질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여 기술격차가 크게 줄어들었고 일부 제품에서는 이미 한국을 따라잡았다는 소식이 공공연히 들리고 있다. 가격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중국산에 밀리고 품질마저 따라잡히게 된다면 한국 철강시장에서는 한국 철강업체가 설자리는 어디가 될지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4만달러 시대는 고사하고라도 3만 달러 시대를 현재의 철강산업이 뒷받침해 줄 수 있을지 매우 우려스럽다.

북한의 개방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개방 초기에는 대규모의 철강재 수요가 반드시 뒤따른다. 도로, 교량, 철도, 항만과 같은 인프라뿐만 아니라 주택, 상하수도, 공장 등 모든 건설공사 현장에서 철강재의 수요가 봇물 터지듯 나올 것이다.

만약 한국 철강산업이 중국과 경쟁에서 패배하기라도 한다면 북한 개방의 기회에서 한국은 먼 산 바라보듯 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그 열매는 중국, 일본의 철강업체들이 독차지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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