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앤스틸 서정헌 대표이사 사장
▲ 스틸앤스틸 서정헌 대표이사 사장
지난 11월 15일 당사가 개최한 후판세미나에서 논의된 후판 구조조정과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였다. 2016년 보스톤컨설팅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후판은 약 4~5백만톤 정도 과잉이라고 한다. 그래서 후판이 우리나라 대표적인 철강 구조조정 대상 품목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 철강시장에서 후판이 유달리 과잉에 시달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필자의 생각으로 철강사간 경쟁구도의 왜곡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제철이 범현대가인 현대중공업의 후판소비를 고려하지 않았다면 당시 후판공장 투자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후판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과잉의 규모를 계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장에서 퇴출의 속도와 승자와 패자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에 대한 심판기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후판 5백만톤의 과잉을 줄이기 위해서 포스코 4개공장, 현대제철 2개공장, 동국제강 1개 후판 공장 중 어느 공장이 어떤 순으로 시장에서 퇴출하여야 할까?

우리나라 조선과 후판은 모두 과점적 경쟁구도를 가지고 1:1로 대응하면서 높은 산업간 상호의존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후판업계도 최근 들어서는 비조선부문으로 다변화 노력은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후판산업의 조선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철강산업의 특성상 후판은 안정적인 공급을 원하지만, 수요산업인 조선은 큰 경기변동을 보인다. 산업간 경쟁구도가 칼날 위에 선 것과 같다. 따라서 후판이 수요산업인 조선의 경기변동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조선과 후판이 산업간 균형을 맞추는 일이 후판의 산업경쟁력을 제고하는 중요한 과제가 된다. 후판이 공급과잉이거나 부족한 상황이 되면 산업간 불균형이 생기고 후판의 산업경쟁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향후 조선경기가 반등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지만 지금 세계 조선경기는 최저점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저점을 기준으로 과잉을 계산한다면 과잉의 규모가 과대평가 될 수 있다. 만약 당장 5백만톤 규모의 후판설비를 퇴출시킨다면 다시 호황이 돌아왔을 때 사업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런 우려 때문에 5백만톤 규모의 구조조정을 당장 추진하기보다는 먼저 업계가 힘을 모아 감산을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최근 후판수입이 저조한 수준이라 감산을 위한 일차적인 여건은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감산을 위해서는 우리나라 후판 3사의 공조가 필요한데 포스코, 현대제철, 동국제강 3사간 시장지배력에 너무 큰 차이가 있어 감산을 위한 공조가 쉽지 않은 측면도 있다.

단기적으로 감산을 위한 노력도 필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구조조정을 위한 준비도 필요하다. 우리나라 철강사들은 후판부문에서 수년간 적자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구조조정을 위한 첫 단추도 꿰지 못하고 있다. 당장 시장에서 퇴출되어야 할 후판공장을 결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적자를 안고도 계속 생산활동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철강업계 전반에 비효율성이 누적되고, 언젠가는 지불하여야 할 사회적 비용도 증가하게 된다. 철강 구조조정은 너무 빨라도 문제지만 너무 늦어도 많은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후판산업이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시장에 공정한 심판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후판시장에서 심판기능을 할 수 있는 주체는 시장과 정부 뿐이다. 시장에 의존하는 구조조정을 하기 위해서는 시장에 공정한 경쟁이 작동하여야 한다. 공정한 경쟁구도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구조조정을 시장에 맡겨 두면 힘든 구조조정을 하고도 산업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 현 상황에서 구조조정을 시장에만 맡겨두면 경쟁력 없는 공장이 철수하는 것이 아니라 힘없는 철강사만 철수하게 된다. 시장지배력이 약한 철강사부터 철수하면서 시장지배력이 강한 철강사 중심으로 재편되어 특정 철강사의 시장지배력만 더 강화된다. 결국 철강사간 공정한 경쟁구도는 더 왜곡되게 될 것이다.

만약 시장을 못 믿으면 정부가 직접 구조조정에 나설 수밖에 없지만 정부가 시장보다 더 구조조정을 잘 한다는 보장도 없다. 정부와 대기업의 정경유착으로 정부개입이 공정하지 못할 경우 구조조정 열쇄를 정부에 준다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단기간에 철강사간 경쟁구도를 바꾸는 것은 어렵다. 공정한 경쟁구도를 위해 당장 가능한 것은 시장에서 지나치게 힘이 남용하는 선도기업을 정부가 어느 정도 견제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나라 철강산업 성장과정에서 시장과 정부의 역할은 각각 어느 정도일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시장보다 정부의 역할이 훨씬 더 컸다고 생각한다.

- 정부가 포스코 건설을 결정했다.
- 정부가 제2제철소 진입을 규제했다.
- 정부가 철강가격을 통제했다.
- 정부가 현대제철의 한보철강 인수를 수락했다.
- 정부가 현대차그룹의 고로진입을 허용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성장과정을 보면 중요한 선택은 시장이 한 것이 아니라 주로 정부가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장의 기능보다는 정부의 선택이 지금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모양을 만들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돌아보면 시장의 힘만으로 우리나라 철강산업 구조조정을 주도한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나라 철강산업 구조조정에서도 정부가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국제강은 1후판과 2후판 공장을 철수하고 당진에 새로운 후판공장을 건설하여 나름대로 생존을 위한 독자적인 전략을 시도하고 있다. 동국제강이 철수한 자리는 힘의 흐름을 따라 현대제철 후판이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후판사업 타당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다른 철강사와 다르다. 대규모 기업집단의 수직계열화를 이용한 사업간 시너지를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제철 후판공장은 적자가 나도 쉽게 시장에서 철수하지 않을 것이다.

국내 후판시장은 강력한 시장지배력을 가진 현대차그룹과 포스코가 주도하고 있다. 포스코는 후판시장에서 가장 큰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선도기업으로 여전히 후판시장에 대한 지배력이 작동하고 있다. 후판시장에서 현대제철과 현대중공업의 수직계열화가 자동차시장에서 현대차와 수직계열화보다 약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포스코의 후판 시장지배력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가장 오래된 소규모 설비인 포스코 제1후판 공장의 퇴출을 기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포스코로서는 제1후판 공장이 시장적응력이 더 높고 효율적인 측면이 있다.

우리나라 후판시장에는 심판이 없다. 심판이 없는 운동장에서 공정한 경기를 할 수 없듯이 효율적인 구조조정도 기대하기 어렵다. 시장도 제대로 심판기능을 못하고 정부도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후판산업은 여전히 적자의 늪에 빠져 있고, 구조조정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구조조정이 지연되면서 사회적 비용만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시장과 정부의 역할로는 구조조정이 된다 하더라도 산업경쟁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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